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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파이터] ⑧ ‘캡틴 아메리카’ 랜디 커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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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파이터] ⑧ ‘캡틴 아메리카’ 랜디 커투어
  • 유 하람
  • 승인 2018.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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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디 커투어 ©Flickr

[랭크5=유하람 칼럼니스트] 모르긴 몰라도 선수를 평가하는 기준은 대부분 숫자로 결정된다. 연승 횟수·방어전 횟수·벨트 개수·전체 승률·집권 기간·경기 시청률 혹은 PPV 판매량 등등…. 격투 패러다임을 바꾸는 업적을 남기지 않는 이상 선수에 대한 평가는 보통 기록에 근거하며, 그중에서도 전적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격투기란 누가 가장 강한지 가리는 스포츠다. 따라서 격투기 선수 커리어는 ‘누구’와 ‘어떻게’ 싸워 ‘얼마나’ 이겼는지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선수들을 압도적으로 때려눕히며 통산 승률 80% 이상을 기록했던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조제 알도·미구엘 토레스 등을 위대한 챔피언이라 부르는 이유 역시 달리 없다.

그런 의미에서 랜디 커투어는 전설이라기엔 다소 초라한 구석이 있다. 전적부터가 19승 11패로 지극히 평범하다. 그 안을 들여다봐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다. 동시대 라이벌이었던 척 리델에게 막혀 시대의 승자가 되지도 못했고, 심지어 엔센 이노우에·발렌타인 오브레임 같은 C급 선수들에게 탭을 치기도 했다. 기복이 있더라도 누구든 때려눕힐 수 있는 선수 역시 아니었다.

- 시작부터 늦깎이, 그리고 챔피언 등극

많은 미국 파이터가 그렇듯, 랜디 커투어 역시 엘리트 레슬러 코스를 밟고 종합격투기로 넘어온 케이스였다. 1988년부터 그는 세 차례 연속 올림픽 대표 후보선수로 활약했고, NCAA에서 3회 올 아메리칸을 기록하는 등 레슬러로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는다. 91년 판아메리칸 게임에선 91년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으며, 은퇴 후엔 잠시 대학 레슬링 코치를 맡기도 했다.

그러던 중 커투어는 우연히 종합격투기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내 그는 평소 친분이 있던 맷 린들랜드·댄 핸더슨과 의기투합해 팀 퀘스트를 창단하고 MMA에 뛰어든다. 97년 데 UFC 13 헤비급 토너먼트에 참여한 그는 가뿐히 우승을 차지하며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른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아마추어 레슬러 시절 마크 커와 대결하고 있는 랜디 커투어

동갑내기들이 은퇴할 시점에 그가 격투기에 데뷔한 배경에는 군 복무가 있었다. 커투어는 1982년 스무 살이 되자마자 101 공수사단으로 입대했으며, 이후 6년간 부사관으로 복무했다. 보통 선수들이 한창 전성기를 누릴 시간을 나라에 바치고 시작한 셈이다. 이 때문에 그는 본격적인 레슬링 커리어부터 스물여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누가 나이는 숫자라 했던가. 레슬러 시절에도 좋은 성적을 냈던 커투어는 종합격투기로 넘어오면서부터 빠르게 벨트를 수집한다. 커투어는 데뷔 후 단 4전 만에 헤비급 토너먼트에 이어 헤비급 정규 타이틀을 거머쥐며 명실상부한 헤비급 강자로 등극한다. 여기서 그의 발목을 잡은 건 나이가 아니라 그의 기량 자체와 계약 문제였다.

- 연패와 방황에 빠지다

UFC 15.5 대회에서 모리스 스미스를 꺾고 정규 챔피언에 오른 커투어는 단 한 차례도 방어전을 치르지 않은 채 타이틀을 반납한다. 계약 문제로 UFC를 떠나 일본 무대로 발을 돌렸기 때문이다. 당시 격투기 시장에서 메이저는 일본이었고, 종합격투기 선수로서 커투어가 일본으로 간 데는 계약 문제를 넘어 입신양명의 의지도 담겨있었다고 보인다.

하지만 일본에서 커투어를 기다리고 있던 건 챔피언 벨트가 아니라 흑역사였다. 일본 무대에 진출하자마자 그는 귀신같이 2연패를 기록한다. 특히 한 번도 A급 선수였던 적이 없는 엔센 이노우에게 99초 만에 암바로 패한 경기는 커투어에게 상당히 굴욕적이었다. ‘더티복싱’을 비롯해 케이지를 최대한 이용해 싸우던 커투어는 링에서는 그저 그런 B급 선수였다.

랜디 커투어에게 커리어 첫 패배를 안긴 엔센 이노우에(우측에서 두 번째)

연패에 충격을 받았는지 2000년 그는 잠시 종합격투기 생활을 쉬고 아마추어 레슬링에 전념하겠다 밝혔다. 그러나 종합격투기와 병행하면서도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그레코로만형 은메달을 차지했던 팀 동료 맷 린들랜드와 달리 그는 상비군에 뽑히는데도 실패하고 만다.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고, 결국 그는 곧바로 종합격투기에 돌아온다.

- 내 자리는 옥타곤이다

케이지로 돌아온 커투어는 UFC 복귀전에서 케빈 랜들맨을 제압하며 또 한 번 UFC 헤비급 챔피언에 오른다.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일본 무대도 발렌타인 오브레임에게 53초 만에 길로틴초크로 패하며 Rings King of Kings 토너먼트 4강에서 탈락한 이후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의 자리는 옥타곤이라는 사실을 본인도 받아들이게 됐다고 하겠다.

물론 순탄치는 않았다. 페드로 히조를 상대로 두 차례 타이틀을 방어한 이후 조쉬 바넷에게 벨트를 뺏겼고, 리코 로드리게스에게도 KO패를 당하며 연패에 빠졌다. 옥타곤 무패 신화도 깨진 이때 커투어는 이전 같은 외도가 아닌 정공법을 선택했다. 바로 라이트헤비급 전향이었다. 새 체급에 도전한 커투어는 타격가 리델에게 타격으로 덤벼드는 전략적인 수로 잠정 타이틀전에서 승리하고, 챔피언 티토 오티즈를 압살하며 타이틀을 들어 올린다. UFC 사상 최초로 두 체급 챔피언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랜디 커투어가 척 리델과 처음 맞붙은 UFC 43

비토 벨포트에게 경기 시작하자마자 생긴 컷으로 KO패 처리되며 황당하게 벨트를 빼앗기기도 했지만, 곧바로 재경기에서 그를 피칠갑으로 만들어버리며 통산 두 번째 라이트헤비급 벨트를 차지한다. 이어 그는 라이벌 척 리델과 함께 UFC의 신인 발굴 프로그램 TUF에서 코치를 맡게 되는데, 이 방송이 전례 없는 히트를 기록하며 커투어 역시 몸값을 불리게 된다.

- 최후의 도전, 그리고…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여기까지였다. 1차전과 달리 레슬러의 접근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리델 앞에 그는 두 차례나 무릎 꿇으며 벨트를 빼앗겼다. 어느덧 그는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었고, 선수로서도 챔피언만 다섯 번을 지내며 이룰 만큼 이룬 상태였다. 벽을 마주했을 때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실제로 그는 은퇴를 선언했다.

랜디 커투어는 체육관 사업 외에도 배우 생활을 겸업하고 있어 은퇴 당시 연기에 집중하리라는 예상이 많았다

커리어를 함께했던 팀 퀘스트를 떠나 익스트림 커투어짐을 차릴 때만 하더라도 그는 이제 완전히 후진 양성을 위해 물러선 듯 보였다. 작은 체격 때문에 선택했던 라이트헤비급에서도 한계를 맞이한 만큼 헤비급에서도 라이트헤비급에서도 그가 있을 자리는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2007년, 은퇴를 선언한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커투어는 복귀를 선언한다. 복귀전 상대는 다름 아닌 헤비급에서 독재를 이어나가던 극강 챔피언 팀 실비아였다.

전부터 덩치 크고 힘 좋은 선수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던 랜디 커투어가 2미터가 넘는 신장과 파괴적인 타격을 자랑하는 팀 실비아를 이기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그는 분위기 좋게 제 체급에서 연승을 달리고 있는 선수도 아닌, 아래 체급에서 한계를 느끼고 은퇴했다 돌아오는 선수였다. 그리고 모든 지표가 그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커투어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거대한 체격과 긴 리치로 상대를 제압했던 실비아는 커투어의 스피드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레슬러인 커투어가 실비아를 펀치로 다운시키는 장면까지 나왔으며, 25분 내내 커투어의 빠르고 정교한 레슬링에 실비아는 힘을 쓰지 못했다. 당시 실비아가 허리 부상으로 수술이 필요함에도 데이나 화이트 대표의 강요로 경기에 나왔다곤 하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윗이 이긴 격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흔다섯 살에 여섯 번째로 벨트를 두른 커투어의 승리 소감은 뭇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늙은이치고는 괜찮지 않아요?”

- 진정한 캡틴 아메리카

이후 커투어는 크로캅을 격침시키고 올라온 가브리엘 곤자가를 가뿐히 제압한다. 예멜리야넨코 표도르와의 드림 매치는 간절히 원했지만 결국 무산됐고, 한동안은 옥타곤이 아닌 법정에서 UFC를 상대로 긴 싸움을 벌여야 했다. 돌아와서는 피지컬 괴물 브록 레스너에게 타이틀을 빼앗겼고, 이후엔 상징성이 큰 경기를 주로 뛰다 마흔아홉에 료토 마치다 전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그의 커리어를 되돌아봤을 때 그는 유달리 강한 선수는 아니었다. 체급을 휘어잡은 정도로 치자면 동시대를 삼분했던 티토 오티즈·척 리델이 곱절은 나으며, 단기적으로나마 보여주는 ‘포스’를 따져도 표도르·크로캅 등을 따라가지 못했다. 케이지에서 무패를 달리던 시절에도 링에서는 힘조차 쓰지 못하고 무너지는 등 ‘천하무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랜디 커투어는 은퇴하는 순간까지 몸 상태가 망가진 적이 없을 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했다

하지만 그가 은퇴한 지 7년이나 지난 지금, 감히 랜디 커투어가 전설이라는 데 이견을 갖는 사람은 없다. 그는 명실상부한 최강이라기엔 흠이 많았지만 누구보다 자기관리에 철저했고, 중요한 무대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결실을 맺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나이와 초라한 전적에는 과분할 만큼 많은 벨트는 그 방증과도 같다. 그는 은퇴할 때까지 UFC에서만 헤비급 토너먼트 챔피언 1회·헤비급 챔피언 3회·라이트헤비급 챔피언 2회를 지냈으며, 이만큼 메이저 단체에서 여러 차례 챔피언을 지낸 선수는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다.

흔히 얻기보다 지키기가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잃고서 다시 얻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리고 랜디 커투어는 잃고 얻기를 다섯 차례나 성공한 선수다. 케이지 200% 활용법을 제시하고 선수 권리 확보와 선수 노조 결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등 그가 남긴 업적은 한참 더 있지만, 커투어가 유독 감동을 주는 선수인 이유는 아무래도 이 같은 도전 정신과 꾸준함이다. 그는 정말 ‘캡틴’이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흔들림 없이 항상 선봉에 서 있던 미국의 에이스였다.

유하람 칼럼니스트 droct89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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