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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파이터] ⑨ ‘작은 거인’ 유라이아 페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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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파이터] ⑨ ‘작은 거인’ 유라이아 페이버
  • 유 하람
  • 승인 2018.03.15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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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라이아 페이버 페이스북

[랭크5=유하람 칼럼니스트] 종목을 불문하고 투기종목 흥행의 축은 헤비급에서 시작했다. 무하마드 알리·마이크 타이슨을 필두로 한 복싱 시장이 그랬고, 피터 아츠·제롬 르 벤너 등을 앞세운 킥복싱 무대도 마찬가지였다. 종합격투기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이스 그레이시 정도를 제외하면 1세대를 이끈 스타들은 대부분 키모 레오폴트·마크 커·탱크 애봇 등 거대한 체격을 자랑했다. 다음 세대 역시 예멜리야넨코 표도르·미르코 크로캅 등 헤비급 선수들이 이어받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체가 무게를 싣는 체급은 점차 낮아졌다. 복싱을 대표하는 얼굴은 플로이드 메이웨더와 매니 파퀴아오가 된 지 오래며, 종합격투기는 코너 맥그리거가 가장 잘 나가는 챔피언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보통 대중이 해당 종목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초창기에는 강력한 한 방이 있는 중량급을 선호하지만, 점차 동작이 눈에 익음에 따라 박진감 있고 수준 높은 경량급으로 시선이 옮겨진다고 분석된다.

격투 스포츠가 으레 그렇듯 판도가 바뀌기 위해서는 스타플레이어가 필요하다. 경량급이 흥행의 주도권을 가져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투기 종목에서 경량급이 인기를 얻을 때는 확실한 실력과 인기를 가진 선수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종합격투기에서는 그게 바로 유라이아 페이버였다.

- 등장부터 천하무적, 페더급을 집어삼키다

유라이아 페이버는 잘 알려진 대로 경량급 역대 최고 레슬러 중 하나다. 하지만 그는 아메리칸 레슬러 대다수처럼 대학 레슬링에서 성적을 낸 스타일을 기반으로 그라운드 앤 파운드를 펼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페이버는 전국 토너먼트 본선 2회 진출이 대학 레슬링 경력 전부일 만큼 정석 레슬링에 강한 선수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자기 격투 철학에 입각한 그래플러 스타일 레슬링을 무기로 내세웠다.

페이버의 대학 레슬러 시절. 그는 순수 레슬리으로는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

페이버는 다양한 파이팅을 선보이는 선수는 아니지만, 자기 스타일을 연마해 완성도를 높이는 데는 탁월했다. 그를 나타내는 동작으로는 단타 라이트 훅으로 짧은 그로기를 안기고 테이크다운, 혹은 백을 내준 뒤 스윕을 통해 역으로 백을 잡기가 있다. 그리고 페이버 커리어 13년 동안 이 두 가지 시그니처 무브를 공략한 선수는 단 일곱 명에 불과하다. 다른 모든 상대는 이 기술을 알고도 당한 셈이다.

또, 페이버는 몇 가지 기술을 극한으로 완성하는 장인정신뿐 아니라 살벌한 재능도 가진 선수였다. 2003년 글래디에이터 챌린지 데뷔할 당시 그는 주짓수를 단 1개월 수련하고 대회에 나섰다. 그리고 그는 불과 82초 만에 상대 제이 발렌시아를 길로틴 초크로 제압하며 팬들에게 충격을 안긴다. 그가 가진 천재성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재능과 꼼꼼함으로 무장한 페이버는 데뷔 후 21승 1패라는 경이로운 전적으로 경량급에 일약 돌풍을 일으킨다.

- 경량급 독재자에 등극하다

페이버는 거침없었다. 등장하자마자 중소단체 GC와 KOTC 밴텀급 타이틀을 따낸 후, 그는 2006년 경량급 최대 격전지 WEC와 계약한다. 입성과 동시에 페이버는 페더급으로 월장해 왕좌에 도전한다. 보통 메이저에 진출할 때는 체급을 유지하거나 내리는 경우가 많지만, 페이버는 자신감이 넘쳤다. 실제로 그는 당시 WEC 페더급 챔피언 콜 에스코베도를 2라운드 TKO로 잡아내며 세 번째 벨트를 거머쥔다. 데뷔한 지 불과 3년 만에 세계 정상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WEC 타이틀만 다섯 차례 방어하며 명실상부한 독재자로 등극한다. 이는 WEC가 UFC에 합병돼 소멸하기까지 깨지지 않은 최다 방어 기록이며, UFC에서도 체급별 사상 한 명 이룰까 말까한 업적이다. 그 과정도 화려했다. 페이버는 미친 듯한 공격성으로 당시 21승 중 17번을 피니시로 장식했다. 제프 커란‧도미닉 크루즈 같은 강자도 판정까지 버티지 못했을 정도였다. 일찍이 2000년부터 적수가 없었던 벤텀급 최강자 미구엘 토레스와 더불어 그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당대 최강자였다.

페이버는 34번의 승리 중 판정 경기가 7번 뿐일 만큼 화끈한 파이팅으로 유명하다

실력‧화끈함은 물론 경량급에서 보기 드문 피니시 능력까지 갖춘 페이버를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여기에 그는 약물‧사생활 등 경기장 밖에서 사소한 트러블 하나 내지 않고, 특유의 유쾌한 성격으로 팬서비스도 충실했다. 어디 하나 흠 잡을 구석 없었던 그가 팬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대 메이저 단체들도 개설하지 않을 만큼 인기 없던 라이트급 이하 체급들이 살아남은 데는 페이버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페이버가 있었기에 WEC가 있었고, WEC가 있었기에 경량급이 유지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다.

- 위대한 콩라인

유라이아 페이버의 커리어는 2008년 기점으로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전기는 승률 95%를 기록하던 전성기이며, 후기는 부동의 이인자를 고수하던 ‘콩라인’ 시절이다. 전기는 챔피언으로서, 또한 선구자로서 남긴 업적이 주요 키워드다. 반면 후기는 유라이아 페이버라는 한 선수가 얼마나 성실하고 대단한 선수였는지 그 진면목이 드러나는 기간이다.

2008년 페이버는 마이크 브라운에게 다소 뜬금없이 패하며 타이틀을 빼앗긴다. 그리고 페이버는 은퇴하기 직전까지 경이로운 기록 하나를 유지한다. 바로 ‘논타이틀전 무패, 타이틀전 전패’였다. 그는 2016년 은퇴하기까지 7번의 타이틀전을 더 치르는데, 은퇴 1년 전 프랭키 에드가에게 패하기 전까지 이 기록은 깨지지 않는다. 이때 30대 후반에 접어들며 신체적 한계까지 찾아온 페이버는 브래드 피켓을 잡고 유종의 미를 거두며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하는 순간까지 페이버는 많은 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는 다섯 차례 타이틀을 방어했을 때 이미 위대한 선수였다. 하지만 그는 진정 칠전팔기로 끊임없이 도전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나갔고, 그 결과 은퇴하는 순간까지 동 체급 최강자 명단에 유라이아 페이버라는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그가 ‘위대한 콩라인’이라 불리는 데 이견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 페이버가 남긴 것

조르주 생 피에르‧바스 루턴처럼 커리어 정점에서 떠난 선수는 있었다. 미르코 크로캅‧사쿠라바 카즈시 등 망가질 대로 망가져도 끝까지 투지를 불태우는 인물도 있었다. 비제이 펜과 존 존스 같은 천재는 격투기 역사에 숱하게 있었고, 포레스트 그리핀처럼 단체를 일으킨 선수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혈혈단신으로 체급 자체를 일으켜 세우며, 커리어를 완전연소하고도 떠날 때 박수 받은 천재는 페이버가 유일하다.

많은 이가 기억하는 대로, 그는 역대 최강의 선수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선수로서 할 수 있는 전부이자 그 자체로 귀감이 됐다. 업적‧실력‧개성‧화끈함부터 흠 잡을 데 없는 자기관리까지. 그가 남긴 모든 유산은 종합격투가가 갖춰야 하는 덕목이자 기초로 남아있다. 유라이아 페이버가 최강은 아닐지언정 최고라 불릴 자격이 있는 이유다.

유하람 칼럼니스트 droct8969@naver.com

유라이아 페이버의 격투기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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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ㅈㅇㅈㅅ 2018-03-15 16:28:04
죄송하지만 잘못된 정보가 있네요^^; 페이버 논타이틀 무패는 에드가 한테 깨졌습니다 나름 칼럼기사인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