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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파이터] ‘마지막 황제’ 예멜리야넨코 표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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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파이터] ‘마지막 황제’ 예멜리야넨코 표도르
  • 유 하람
  • 승인 2018.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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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멜리야넨코 표도르 페이스북

[랭크5=유하람 기자] 종합격투기에서 ‘OO신’, ‘OO의 제왕’ 등으로 불린 선수는 많았다. 모든 관중이 고개를 끄덕일 만큼 확실한 퍼포먼스를 보이는 선수라면 으레 이런 이름으로 불렸다. 오랜 기간 헤비급 강자로 군림한 ‘무관의 제왕’ 페드로 히조, 등장과 동시에 돌풍을 일으켰던 ‘소쿠신’ 라모 티에리 소쿠주가 좋은 예다. 하지만 별다른 수식도 없이 ‘황제’라는 칭호 자체로 불렸던 선수는 단 한 명, 예멜리야넨코 표도르 뿐이었다.

그만큼 대단하고 상징적인 인물이 왜, 얼마나 대단한지 설명하기란 참 민망한 일이다. 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이클 잭슨이 어떤 가수였는지 소개하는 일과 같다고 할까. 표도르를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 웬만한 격투팬이라면 그가 ‘웰라운더’라는 개념을 제시한 선구자라는 부분은 알고 인정한다. 그리고 워낙 지지를 않아서 2000년대를 통째로 자기 시대로 만들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표도르는 업적보다도 그 자체에 대한 포커스가 훨씬 다양한 감상을 제공하는 선수다. 그 누구보다도 신격화 됐던 선수인 동시에 악의성 짙은 거품론에 가장 자주 휘말린 파이터, 또한 역사에 손꼽는 위대한 챔피언이면서도 제일 찝찝하게 말년을 장식하고 있는 인물. 표도르. 그가 의심할 여지없이 위대하다면, 이번엔 항상 커뮤니티를 불태웠던 ‘떡밥’인 ‘파이터 표도르’를 곱씹어볼만 하지 않을까.

- ‘재능러’, ‘종합격투기’를 제시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표도르는 격투기 데뷔 전부터 ‘뭘 해도 될 사람’이었다. 1994년에는 직업전문학교를 단과대 수석으로 졸업했고, 1997년 군 소방관으로 제대한 후엔 삼보와 유도 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1999년 이스탄불 컴벳 삼보 유러피안 챔피언십 +100kg급 우승이 시작이었으며, 2000년부터 종합격투기 병행하면서도 연달아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표도르는 종합격투기 챔피언을 지내면서도 11차례나 컴뱃 삼보 대회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탄탄대로를 걷던 표도르가 진짜 ‘거물’이 된 건 일본 종합격투기 무대인 링스(Rings)로 건너가면서부터였다. 표도르가 수련한 컴벳 삼보는 실전성을 강조한 고전 유도의 분파로, 단일 종목으로는 현대 종합격투기에 가장 가까운 무술 중 하나로 꼽힌다. 다운 없는 스탠딩 타격은 점수 반영이 거의 안 되는 등 최신 트렌드와는 차이가 있으나, 베이스가 되는 단일 종목으로 대결을 펼치던 ‘이종격투기’ 시대에는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더군다나 표도르는 자기 기술과 상대 특성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뛰어난 선수였다. 그는 컴뱃 삼보가 가진 여러 무기를 상대에 따라 언제 어떻게 꺼내 써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거인 타격가 세미 슐트는 그래플링으로, 주짓수와 복싱이 좋은 호드리고 노게이라에게는 타격 연계 테이크다운과 파운딩을 써먹었다. 테이크다운 디펜스와 타격이 모두 좋은 미르코 크로캅에게는 킥을 봉쇄하고 속도전을 강요해 지치게 만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약점을 공략하고 강점은 살리는 이 단순한 알고리즘이 왜 대단한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허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초창기 격투기는 레슬링과 주짓수, 복싱과 스트릿 파이팅, 강함과 강함이 무식하게 부딪히던 ‘싸움’이었다. 레슬러는 테이크다운 시키지 못하면 스탠딩에서 KO 당했고, 복서는 바닥에 눕는 순간 패배해야 했다. 그리고 표도르는 ‘컴플리트 파이터’라는 개념을 최초로 제시하며 이 스포츠에 전략과 다양성을 부여했다.

- 예견된 천하통일, 예견된 몰락

컴뱃 삼보의 강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표도르는 종합격투기 27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승승장구했다. 데뷔 무대 링스는 물론 메이저 무대 프라이드 FC(PRIDE FC)로 이적해서도 사실상 무패를 달리며 체급 흥행을 견인했다. 프라이드 도산 후 어플릭션 등에서도 전 UFC 챔피언들을 연달아 제압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종합격투기 발전을 10년은 앞당겼다는 세간의 평가대로, 그는 꼭 그 햇수만큼 최강자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운명의 얄궂은 장난인지 데뷔한지 10년이 되던 해부터 표도르는 충격적인 3연패를 기록하며 추락했다. 시대를 앞서간 이해도로 정점에 섰지만 그는 그 앞서나간 지점에서 멈춰있었다. 이제 선수들은 컴벳 삼보로 커버하기엔 레슬링‧주짓수‧무에타이 모두 너무나 훌륭했다. 오히려 삼보를 고집하는 표도르가 구식으로 보이게 됐다. 이종격투기 시절에 표도르의 컴벳 삼보는 더할 나위 없이 ‘종합격투기적’이었지만, 정작 '종합격투시대'가 열리자 그는 너무나 '이종격투적'이었다.

표도르는 파브리시오 베우둠 전을 기점으로 급격히 무너진다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징조는 최대 라이벌로 꼽히던 미르코 크로캅과 일전을 펼친 후 계속 나타났다. 물 흐르듯 한 타격-테이크다운 연계와 능수능란한 그래플링은 이제 통하지 않았고, 표도르는 그나마 여전히 빠른 손과 좋은 눈으로 버티며 타격으로 상대를 쓰러뜨렸다. 부잣집은 망해도 3대는 먹고 산다고 타고난 재능이 워낙 뛰어나 시대에 뒤처지면서도 어떻게 견뎌내던 표도르도 2010년에 들어서자 결국 한계를 맞이하고 말았다. 인간에게 불을 전달한 선구자 프로메테우스가 현대인에게는 신화 속 존재인 것처럼, 표도르는 어느덧 옛날 사람이 돼버렸다.

- 평범하기엔 너무 비범했던 남자

표도르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 짚고 있노라면 얼핏 ‘표도르는 컴뱃 삼보의 위대함과 한계를 증명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에게 성공과 실패란 곧 베이스 무술 자체에서 비롯됐으니 말이다. 물론 그가 그토록 다양한 기술을 바탕으로 상대를 요리할 수 있던 바탕은 분명 컴벳 삼보였다. 하지만 표도르 성공비결이 단지 컴벳 삼보였다는 전제는 ‘최홍만이 K-1에서 활약했으니 씨름은 입식타격기에 유용한 무술이다’라는 말과 같다. 우리는 프라이드에서 얼마나 많은 러시안 탑팀 소속 삼보 파이터가 스러졌는지 알고 있으며, 씨름 선수출신 킥복서가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알고 있다.

즉, 예멜리야넨코 표도르라는 인물이 그린 상승과 추락 곡선을 바라볼 때는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왜 10년을 앞서갔다는 그는 이젠 10년이나 뒤쳐진 선수가 됐을까. 왜 그는 아직도 러시아의 낡은 체육관에서 턱걸이와 타이어 치기에만 열중하고 있을까. 파릇파릇한 삼보 후배 하빕 누르마고메도프가 명문 체육관을 찾아가 기술을 배울 때 그는 왜 우물 안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한국 팬들 사이에서는 반 우스갯소리로 표도르 매니저 바딤 핀켈슈타인이 M-1 글로벌 유지를 위해 그를 잡아뒀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가 걸어온 길을 보고 있자면 그를 가둔 건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표도르의 AKA 등 미국 명문 팀 이적은 팬들의 오랜 염원이자 '떡밥'이었다

그는 종종 “나는 전설이 아니라 평범한 남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대학 시절과 삼보 커리어에서 보이듯 그는 그저 자기 할 일에 묵묵히 충실한 편이었다. 프라이드 FC 시절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입는 정체불명의 티가 화제가 될 정도로 검소하고 단출한 사람이기도 했다. 단지 그렇게 평범하게 자기 일에 매진해도 너무 돋보일 만큼 타고난 재능이 비범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가 칭송 받던 조용하고 소박한 모습과 비판 받던 폐쇄적 훈련 방식은 맞닿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표도르의 몰락을 자만, 혹은 맹목이라고 그에게 몰아세우기 어려운 이유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물론 그도 선수로서 욕심에 완전히 초연하지만은 않다. 표도르는 전성기 때부터 무패 타이틀에 제법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으며, 지금도 은퇴시기를 놓쳐가며 명예회복을 노리고 있다. 충격의 3연패 후 이름값만 남은 선수들을 잡으며 승수나 간간히 올리고, 한참을 망설이다 뒤늦게 선택한 벨라토르 행 등은 그 자체론 선수 생활 연장 이상 의미를 가지기는 어렵다. 본인부터가 은퇴와 경기 출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도 결국 마지못해 나오듯 싸우는 이유가 별달리 있을까. 참 순박하다면 순박하고 안타깝다면 안타까운 모습 아닌가.

냉정히 말해 표도르가 이제 다시 세계 랭킹에서 활약할 확률은 0에 수렴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잡은 세계 랭커 브렛 로저스는 중소단체에서 승보다 많은 패를 기록하며 사라졌고, 그를 이긴 안토니오 실바도 선수 생명은 이미 끝났다. UFC에서 수문장 정도였던 맷 미트리온도 그를 74초 만에 제압하는 마당에 무슨 기대를 걸 수 있을까. 그렇다고 댄 세번‧제레미 혼처럼 전적 상관없이 끝까지 투혼을 불태우겠다는 자세도 아니라 팬들의 갑갑함은 커져만 가고 있다.

표도르와 동생 알렉산더의 어린 시절. 표도르는 이때와 사는 모습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어쩌면 그를 싫어했던 이들도 이제는 같은 시절을 보냈던 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때 ‘60억 분의 1’이라 불리며 비인간적일 만큼 강했던 그도, 몸이 늙고 마음도 약해지며 사람 냄새가 나서일까. 실제로 각종 커뮤니티에서 쏟아지는 그를 향한 감상은 이젠 마냥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그리고 앞으로도 표도르가 은퇴할 의사가 없는 이상, 그는 생각보다 많이 인간적이었던 한 선수로 당분간은 남을 듯하다.

유하람 기자 rank5yh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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